윌리엄은 늘 나보다 먼저 일어난다. 내가 일찍 일어나서 먼저 준비해야 아침이 덜 분주한데 나는 아침형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윌리엄은 이제 커서 아침에 일어나면 마치 나를 깨우려는 듯 밤새 안고 잔 애착 인형을 침대 밖으로 집어던진다. 가늘고 보드라운 아기새 같은 머리, 빛나는 까만 눈동자, 환한 미소, 들뜬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윌리엄, 오늘은 처음으로 널서리 가는 날이야. 우리 아가 낯선 곳에서 잘할 수 있겠어?
널서리는 8시부터 6시까지인데 오늘은 첫날이니 아침은 집에서 먹고 9시까지 데려가서 4시 반에 찾아올 예정이다. 분유 한 통, 젖병 한 개, 기저귀 7개, 여벌 옷 한 벌과 손수건, 턱받이, 빨대컵, 애착 인형, 얇은 낮잠 이불, 거기다가 혹시 모르니 튤립 사운드북 하나를 챙겼다. 등원 준비 완료.
요즘 스스로 먹기, 숟가락 쓰기를 연습시키고 있어서 밥 먹는 데 한참 걸리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오랜만에 떠먹여줬다. 널서리 첫날이라 널서리에서 잘 못 먹을 것 같아서 집에서라도 든든히 먹고 가야 될 것만 같았다. 윌리엄은 짚고 걷기 시작하고부터 먹는 데 관심을 잃어서 몇 숟갈 먹지 않고 금세 입을 꼭 다문다.
널서리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오른팔로는 윌리엄을 안고 왼쪽 어깨에는 가방을 짊어 메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여름인데 아직 공기가 선선하다. 시원한 바람에 윌리엄의 보드라운 머리가 나풀나풀 날린다.
널서리 입구에서 Settling in session(적응 세션) 때 만난 Nadine 선생님이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서 출생신고서를 선생님께 건네주고, 지난번 못다 작성한 서류를 마저 작성했다. 그 사이 선생님은 윌리엄이 겁에 질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윌리엄을 안았고 나는 선생님께 가방에 뭘 챙겨왔는지 알려주고 윌리엄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널서리를 떠났다. 문을 닫자마자 우는소리가 들렸다.
윌리엄이 울어도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널서리를 믿고 윌리엄을 맡기는 수밖에. 조금 우중충해 보였던 첫인상과는 달리 그날 아침 널서리 분위기는 어쩐지 활기차게 느껴져서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집에 돌아왔다. 윌리엄이 눈에 아른거릴 줄 알았는데 뜨끔할 정도로 내 마음은 홀가분했다. 출산 후 10개월 19일 만에 처음으로 여유 시간이 생겼다.
회사 메일을 열었다. 업무에 복귀하면 빠르게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윌리엄을 널서리에 보내놓고 책상에 앉아서 권태로움을 느끼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또 연봉협상도 하고 싶었다. 물가는 많이 올랐는데 내 연봉은 창피하리만큼 낮은 자리 그대로다.
오늘은 새로운 업무 프로세스 관련 트레이닝 영상만 워밍업 정도로 보기로 했다. 오후 1시가 지나고 나른한 시간이 찾아오자 윌리엄 생각이 났다. 널서리 선생님들이 아무리 전문가라도 윌리엄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배고프지는 않은지, 낮잠은 제때 자는지, 울지는 않는지, 지루하지는 않은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고 시계만 몇 번이고 쳐다봤다. 마침내 윌리엄을 픽업하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다. 널서리 문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윌리엄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 윌리엄은 나를 보더니 잠깐 울음을 왈칵 터트렸다. 집에 돌아온 윌리엄은 평소보다 조용했지만 활력이 넘쳤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놀다가 피곤했는지 그날 밤 깊게 잠들었다.
활기찬 윌리엄 모습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된다. 이제 나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다. 윌리엄이 낯선 환경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독립심을 키워주고 싶다. 아기는 양육자와 신뢰가 형성되면 세상을 안전한 곳으로 인식하고 양육자를 중심으로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아기를 보는 게 체력적으로 지치지만 아기가 씩씩하게 세상에 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있는 힘없는 힘 끌어모아 힘내고 있다.
윌리엄은 10개월 20일. 내가 꼽은 윌리엄의 첫 번째 마일스톤은 윌리엄이 주먹으로 사물을 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77일경), 두 번째 마일스톤은 이유식 시작 (150일경), 그리고 앞으로 기었을 때 (250일경), 다음은 자기 주도 이유식으로 변경 (280일경). 널서리 시작 (323일)은 또 하나의 마일스톤이다. 마일스톤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윌리엄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다. 윌리엄이 자랑스럽다. 젖을 빠는 법, 손, 팔다리를 움직이는 법, 음식을 씹고 삼키는 법, 빨대로 물을 마시는 법, 손으로 음식을 먹는 법 등 다 내가 도와줬지만 결국 윌리엄이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스스로 하나씩 해내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다.
윌리엄, 아기 윌리엄과 함께한 시간, 지나고 나니 아쉬운 게 많다. 아기 윌리엄은 힘찬 에너지 폭발하는 역동적인 아이로 성장했다. 놀라움과 희열로 가득 찬 너의 작은 세계로 나를 초대해 줘서 고맙다. 언젠가 너는 나보다 아빠가 필요하고 친구가 필요하고 멘토를 찾아 떠날 거야. 그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올 것 같아. 그때 아쉬운 마음 없이 너를 내 품 안에서 보낼 수 있도록 나는 내 삶도 열심히 꾸려나갈 거야. 니가 두려움 없이 세상을 탐험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까지 나는 옆에서 너를 도와줄게. 나의 부족함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노력할게. 나를 웃게 해줘서 고맙다. 내 희망의 등대가 되어줘서 고맙다.
'아기와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개월 아기의 분노 (2022년 11월 25일) (0) | 2022.12.18 |
---|---|
윌리엄이라는 새싹 (2022년 10월 6일) (0) | 2022.12.18 |
너의 작은 세계로의 초대 (2022년 3월 18일) (1) | 2022.12.18 |
영원함을 꿈꾸는 시간 (2022년 3월 10일) (1) | 2022.12.18 |
윌리엄을 사랑하기까지 걸린 시간 (2022년 2월 27일) (0) | 2022.12.18 |